STUDY 9

[시] 박노해 - 두 가지만 주소서

두 가지만 주소서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혼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 나갈수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박노해 시집 [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] 수록

STUDY 2020.02.16

[시] 박노해 - 그 겨울의 시

그 겨울의 시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박노해 시집 [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] 수록

STUDY 2020.02.16

[시] 김이듬 - 반불멸

반불멸 - 김이듬 작은 전시관이야 예전에 너하고 봤던 그 그림들이야"카페에서, 르탕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, 그 작품 생각나니? 반 고흐 애인으로 알려진 여자 초상화 말이야근데 그 초상화 다른 여자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네'포도'에도 '노란 장미가 담긴 잔' 에도 다른 못 그린 그림들이 숨겨져 있어가난밑그림으로 한 화가가 재활용한 캔버스의 밑그림이 훤하게 보이는 거야이렇게 회화에 엑스레이를 해보면 덧칠하기 전에 그린 그림들이 보인단 말이지그가 덮어버린 스케치 감췄다고 믿었던 수많은 물감칠 안간힘 쓴 흔적들이 고스란히 들통 나는 거야 전시관 앞 기념품 가게 모퉁이에서 엽서에 몇 자 적어 보낸다내가 죽거든 내 죽품에 엑스레이나 전자현미경을 들이대지 마 낙서도 만화도 아닌 거 훔쳐본 누드 종이를 불에 그을려보..

STUDY 2018.02.20

[시] 최영미 - 괴물

괴물 -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Me too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,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"이 교활한 늙은이야!"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, 100권의 시집을 펴낸"En은 수도꼭지야, 틀면 나오거든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"(우리끼리 있을 때)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..

STUDY 2018.02.19

[시] 최영미 - 돼지들에게

돼지들에게 -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,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.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.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, 그는 모른다.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,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집,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,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.........사람들은 모른다.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.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.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.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.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.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..

STUDY 2018.02.19

[시] 광야 - 이육사

광야 -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금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라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

STUDY 2017.02.20